세조, 과연 폭군인가 개혁가인가? 객관적 평가 정리
역사적인 인물 중에 수양대군, 세조만큼 논의가 많이 되고 드라마나 다큐멘터리의 소재로 많이 다루어진 인물도 없을 겁니다. 이번 글에서는 평가에 대해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수양대군, 세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세조의 공과
세조는 계유정난, 즉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인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올랐으며, 그 이후에도 왕권을 지키기 위해 철권통치와 함께 많은 패륜을 저지른 못된 왕으로 회자되곤 합니다.
하지만 정적과 반대파는 물론 혈족에 대한 피의 숙청으로 살벌한 분위기였던 궁궐과 정계와는 다르게, 일반 백성들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고 윤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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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조의 초상화 |
정권 창출의 정당성에 대한 콤플렉스가 컸던 세조는 왕이 된 이후에도 쿠데타의 공신들은 물론 많은 다른 신하들과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군신 간의 실질적인 관계를 돈독히 한다는 명분이 있었으나, 본심은 왕위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신하들의 솔직한 생각이나 마음을 술기운을 통해 파악하고 싶었던 의도가 더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군신 간의 술자리에서 세조는 어떤 때는 별것 아닌 말에도 지나치게 민감하게 화를 내고, 어떤 때는 예를 벗어나거나 크게 말실수를 해도 너그럽게 용서하는 변덕을 부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관직을 파직당하고 멀리 유배를 가거나 심지어 사형까지 당하는 신하까지 있었습니다. 또한 정권 창출 공신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도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세조 특유의 추진력이 발휘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늘만 바라보지만 지혜로운 자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고 적극적으로 개척해 나간다'는 철학이 정권 쿠데타의 기본 바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미묘한 명나라와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여진족 토벌을 추진한 것, 전국 방위 체제인 진관 체제와 함께 중앙집권 체제를 굳건히 구축한 것, 직전법의 실시와 토지 개간을 확대하여 농업 생산량을 증대하고 농업을 장려한 것, 조선 왕조의 기초 법전이 된 경국대전을 편찬하도록 한 것 등은 모두 세조의 적극성과 추진력이 아니었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세조의 변화입니다. 세조가 쿠데타에 대한 콤플렉스를 이겨내지 못하고 집권 초기의 철권정치만을 계속했다면 어떠한 좋은 제도도 만들고 실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조는 신하들을 대하는 태도에도 조금씩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장남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지병을 얻은 이후에는 신하들의 제언을 경청하려고 노력하였고 이전의 무례하고 냉혹한 대응은 조금씩 자제하였습니다.
바로 이점 때문에 왕권을 피로 찬탈하고 그 콤플렉스로 인해 결국 폭군으로만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던 세조가 재임 기간 태평성대를 이루고 그나마 적지 않은 치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시사점
역사에는 가정이 큰 의미가 없습니다만, 만약 세종이 문종의 병약함과 단명을 인지하여 세조가 쿠데타가 아닌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왕위에 오르도록 했다면 아마도 더 많은 업적들을 남긴 위대한 왕이 되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리더가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정의와 정당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갖은 병고와 악몽에 시달렸던 세조의 말년을 살펴보면 불법적인 정권 찬탈과 배신에 대한 하늘의 천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왕권의 정당성에 대한 콤플렉스와 죄책감의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민초들만큼은 어느 왕 때보다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한 것은 조금이라도 자신을 행동을 반성하고 속죄하려는 뜻도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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