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돈, 개혁가인가 정치적 희생양인가? 고려말의 비극
공민왕의 눈에 들어 개혁가로서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다가 부패하게 되고, 결국 반대파에 의해 제거되었다고 알려진 승려 신돈은 실제로는 고려 말의 안타까운 정치적 희생양이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어찌 보면 억울하고 불쌍한 삶을 살았던 신돈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승려에서 개혁가로
신돈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기반이 전혀 없어 결코 정치를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절에서 일하는 여종의 아들로 태어나 허드레일만 하는 이름 없는 천한 승려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연이었는지 필연이었는지 공민왕의 눈에 들게 되었고, 왕권 강화에 항상 몰두했던 공민왕에게는 귀족도 관료도 선비도 아닌 그의 보잘것없는 출신 배경이 오히려 충성심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갖게 되었습니다.
신돈은 승려로서 이미 득도하였기 때문에 욕심이 없고 가문이나 배경도 없으니 사리사욕에 구애받지 않고 나라 일을 할 수 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한 공민왕은 마침내 무명 승려인 신돈을 전격적으로 발탁하여 모든 국정을 위임하는 엄청난 인사를 단행하고야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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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돈 |
신돈이 집권한 후 여색 등 여러 잡음이 발생하였으나, 요승이란 비난을 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조정에서 과감하면서도 무자비한 숙청을 실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권력을 잡은 지 1개월도 채 안 되어 지금으로 치면 총리급과 장관급을 제거하고 감찰과 언론을 장악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충분한 계획과 사전 준비를 한 공민왕이 배후에서 조정하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라는 것이 관련 학자들의 의견입니다.
기존의 지배층인 권문세족이 신봉하는 몽고의 원나라를 멀리하고 새로운 지배층인 신진사대부와 함께 명나라와의 관계를 증진하고자 했던 공민왕은 신돈이 국정을 운영하는 동안에도 이 방향의 정책을 끊임없이 추진하였습니다.
이러한 공민왕의 개혁사상과 실질적인 성과는 칭송받을 만하지만,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좋은 정치가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개혁가에서 요승으로
공민왕은 신돈이 자기 뜻대로 움직일 때에는 그에게 전권을 주고 큰 힘이 되어 주었으나, 그가 자기의 통제 범위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전격적으로 제거한 것입니다.
정부 관료들에게 신돈을 죽이라는 상소를 올리라고 암시하고 또 압박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신돈 자신이 일으킨 문제들과 반대파의 공격으로 인해 그가 죽음에 이른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공민왕이 모든 것을 배후에서 조종했던 것입니다.
무명의 승려였던 신돈을 갑자기 개혁가로 만들어 전면에 나서게 한 후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였고, 종국에는 요승으로 몰아 처형되도록 했었던 것입니다.
과거 터키족이 세운 거대 제국인 오스만 제국의 최고 통치자 술탄도 목숨을 걸고 자신에게 충성을 다할 궁정 노예들을 전면에 내세워 통치를 대행하도록 하였었는데, 문제가 발생하여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경우에는 술탄을 대신해서 책임을 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마도 공민왕이 이를 벤치마킹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시사점
대장부로 태어나 한 나라의 최고 권력을 한 번 맛보고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문제는 그 자체가 교묘한 정치적 술수에 의해 진행된 일이었다면 그 가치는 많이 퇴색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신돈은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지지기반이 취약하여 정치적 희생양이 되는 것을 극복할 수 없었던 불운의 인물로 남았습니다.
고려 말에 망해가는 나라를 개혁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였고 소통을 그 무엇보다도 강조하였던 공민왕이 결국 궁극적인 개혁에 성공하지 못한 이유도 이러한 군신 간의 신뢰가 무너진 것이 한몫을 했을 것입니다.
정치의 장이 왜 꼭 권모술수가 난무하고 손바닥 뒤집듯이 언행을 달리하면서 배신을 일삼는 그런 지저분한 곳이 되어야 하는지, 왜 많은 군자들이 얘기하는 인(인), 의(의), 덕(덕)이 중심이 되는 멋진 정치는 보이지 않는 것인지 현재의 정치 상황과 중첩되니 더욱 답답한 느낌이 듭니다.
우리나라에도 신선하고 깨끗한 정치 시대가 곧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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