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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뿌리, 정도전 민본사상의 핵심과 현대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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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본사상을 체계화하고 그 틀을 마련한 정도전! 이번 글에서는 조선 왕조 500년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사상가 정도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도전의 민본사상 정도전이 체계화한 민본사상은 사서삼경 중 하나인 <서경>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본래 민유방본(민유방본)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는 뜻으로, 나라의 지도자는 백성을 우선하여 생각해야 하고 백성이야말로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리석고 못 배운 백성들이라도 지도자보다 나은 사람이며, 이렇게 백성들의 나은 점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의 낮은 자세가 바로 민본사상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민본 개념은 정도전의 저서 <조선경국전>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말 그대로 나라를 경영하는 방법과 규범에 대한 내용인데, 왕의 자리는 매우 높고 귀하지만 힘이나 책략으로 백성들을 좌우할 수 없으며,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면 그들이 복종하지만 반대로 마음을 얻지 못하면 나라가 뒤집히는 큰일이 생긴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방법은 단순히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추켜세우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이 스스로 성장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보살피고 그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절대 나라를 뒤엎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실제 정도전이 설계했던 궁궐의 구조에서도 민본사상을 엿볼 수 있는데, 궁궐 안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낮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는 백성들의 존경과 지지를 얻지 못한 왕들은 제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도전의 민본사상은 서구의 민주주의 개념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거의 완벽한 사상인 것입니다. 삼봉 정도전 비참한 최후, 그러나 영원한 사상 정도전은 시대를 앞선 놀라운 사상가였고 조선의 역사 전반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지만, 세자 책봉 문제로 인해 결정적으로 멀어진 숙적 이방언에게...

현대 회화의 아버지, 폴 세잔의 예술 세계 - 에밀 졸라의 드라마틱한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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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회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20세기 최고의 프랑스 화가, 폴 세잔! 이번 글에서는 프랑스 화가 폴 세잔의 평범하지 않았던 삶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폴 세잔의 드라마 같은 인생 세잔은 프랑스의 유명 작가 에밀 졸라와 중학교, 고등학교를 함께 다녔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게 된 졸라는 집안이 가난했습니다. 거기에다 체구도 작고 말도 더듬어서 다른 친구들에게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그때마다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난 세잔이 졸라를 보호해 주면서 둘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성인이 되면서 반대로 뒤바뀌었습니다. 문제는 세잔을 은행가로 키우려던 세잔의 아버지가 그림에 빠진 아들을 못마땅히 여겨 생활비를 끊었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성공한 졸라가 세잔에게 필요한 생활비를 모두 대주었습니다. 졸라는 20대에 이미 성공한 인기 작가가 되었지만, 세잔은 아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름 없는 화가였습니다. 폴 세잔의 자화상 아이러니하게도 예술에 대한 관심 분야도 서로 뒤바뀌었습니다. 본래 세잔은 문학에, 졸라는 그림에 심취해 있었지만, 오랜 시간 가깝게 지내며 깊은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결국 세잔은 화가로, 졸라는 작가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초기 세잔의 미술 실력은 형편이 없었습니다. 미술학교 입시에도 떨어질 만큼 기초가 부족하여, 실제로 세잔의 초창기 작품들은 기본기가 없는 졸작이 많았습니다. 세잔은 그림을 그리다가 생각이 복잡해지면 절친한 친구인 졸라를 찾아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 용기를 얻기도 하였습니다. 에밀 졸라와의 우정에 금이 간 이유 그러던 어느 날, 둘 사이의 우정에 금이 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유는 졸라가 출간한 소설 때문이었습니다. 주인공인 이름 없는 한 젊은 화가가 자신의 예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비관하고 절망하여 자살한다는 내용의 ‘작품’이라는 소설이었습니다. 소설 속에서 결국 자살하는 불쌍한 젊은 화가가 바로 세잔 자신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세...

위기를 웃음으로 넘긴 처칠의 유머 리더십 8가지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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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노벨 문학상뿐만 아니라 위트 있는 유머의 리더십으로도 유명하였습니다. 특히 2차 세계 대전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유머를 통해 국민들을 위로하고 단합시키기도 했던 훌륭한 리더였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처칠이 보여주었던 유머의 리더십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남대문 처칠은 정계에서 은퇴한 후 나이가 80이 넘어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였는데, 그날도 어느 한 파티에 참석하였습니다. 문제는 화장실에 갔다 오면서 바지 지퍼를 올리는 것을 깜빡 잊고 그대로 파티장으로 돌아오면서 발생하였습니다. 처칠이 파티장에 다시 들어서자마자 한 여자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처칠에게 다가오며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머 총리님! 남대문이 열렸어요!" 이 말에 파티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지면서 썰렁한 분위기로 바뀌었고, 파티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처칠에게로 향하여 자칫 매우 민망한 상황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처칠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 부인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부인! 이미 죽은 새는 새장 문이 열렸다고 해서 밖으로 나올 수 없으니까요!" 순간 파티장은 웃음바다가 되었고, 다시 본래의 파티 분위기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국유화 어느 날, 의회에서 대기업 국유화를 놓고 치열한 설전이 벌어졌습니다. 의원들로 만원이 된 화장실에 소변기 빈자리가 딱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하필 국유화를 강력히 주장하여 처칠과 심하게 논쟁을 하였던 노동당 당수 애틀리의 바로 옆자리였습니다. 회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잠시 정회된 사이, 처칠은 화장실에 들렀습니다. Winston Churchill 하지만 처칠은 비어 있는 그곳으로 가지 않고, 굳이 다른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이를 본 애틀리 노동당 당수가 물었습니다. "제 옆에 빈자리가 있는데 왜 안 쓰고 다른 줄에 서는 거요? 혹시 저한테 뭐 불만이라도 있습니까?" 이 말을 ...

이야기 핵심을 찌르는 재미있는 에피소드 두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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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여러 가지 상황을 보고 듣고 말합니다. 핵심이 빗나갈 때도 있고 정곡을 정확하게 찌를 때도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야기의 핵심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 두 개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책 오랜만에 절친한 친구 사이인 두 할머니가 카페에서 만나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한 할머니가 다른 할머니에게 왜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는지, 걱정도 되고 섭섭하기도 했다고 불만스럽게 얘기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할머니는 한숨을 쉬더니 깊은 사연을 얘기하였습니다. 할머니 1: "나도 너하고 연락하고 싶었지만 큰일이 있었어! 바깥양반이 텃밭을 손보러 나갔다 그만 뇌출혈이 와서 쓰러졌지 뭐야... 그래서 경황이 없었고 연락을 못 했어. 미안해..." 할머니 2: "아이고 그런 일이 있었군. 많이 놀라기도 했겠지만 근심이 많겠네... 그래서 그럼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는 거야?" 할머니 1: "뭐 용빼는 재주 있나? 야채는 이제 시장에서 사다 먹어야지 어떡하겠어?" 핵심유머가 주는 웃음 비유 한 유명한 비뇨기과 병원에 돈이 아주 많은 80대 노인이 방문을 하였는데, 어디가 아파서 진찰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상담을 받고 싶어서 방문하였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시간이 비어 있던 병원장이 상담을 하기로 하였고,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노인: "원장님, 제가 큰 걱정이 있습니다. 네 번째 아내가 또 임신을 했지 뭡니까. 아니, 제가 남들보다 건강하기는 하지만 나이가 80이 넘어서도 이렇게 왕성하니 뭔가 조치를 하던가 약물 치료라도 받아야 하지 않나 해서 이렇게 염치 불구하고 상담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병원장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병원장: "영감님, 잘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영감님께 이야기 하나 해드릴 테니 잘 들어보시고 판단을 한 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고흐의 파란만장한 삶과 예술적 성장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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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의 삶이 대부분 극적이지만 빈센트 반 고흐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산 화가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화가로서의 재능만큼이나 이슈도 많았던 세계적인 인상파 화가 고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의 후기 인상파 화가입니다. 1853년 네덜란드 남부에서 개혁교회 목사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난 고흐는, 태어나기 전에 죽은 형과 이름이 같아 본인이 죽은 형을 대신해 살고 있다는 망상을 자주 했으며, 이 때문에 고흐의 삶이 불행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고흐는 어린 시절 미술보다는 신학 서적과 문학 작품의 독서, 그리고 곤충에 관심이 많아 자세히 관찰하고 꼼꼼하게 수집하며 분류하는 기질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화가가 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고흐는 미술상 직원, 교회 전도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27세의 늦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했습니다. 고향에서 주로 농부들의 삶을 그리면서 그림 실력을 키우던 고흐는, 본인 그림에 대한 한계를 느끼고 파리로 가서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고 또 선의의 경쟁도 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전체적으로 어두웠던 그림의 색채가 밝아지면서 고흐 본연의 개성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점을 찍어 그리는 점묘파 화가들과도 교류하면서, 동일한 짧은 선으로 붓질을 하는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만일 그가 네덜란드 고향에 머무르면서 농촌의 삶을 그리는 것에 만족하고, 파리의 다른 화가들과 교류하거나 경쟁하지 않았다면 고흐도 그저 그런 화가로 일생을 마쳤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흐는 파리에서의 경쟁으로 다양한 화풍과 기법을 빠르게 학습하면서 크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파란만장 했던 인생 화가로 어느 정도 성공한 고흐는 인상파처럼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후에도 뭔가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바로 이때 고갱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고흐는 고갱과 친구가 되면서 예술적으로 또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고갱...

초음파와 소리 파동 특성을 활용한 실생활 기기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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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소리, 음파의 파동 특성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소리, 음파의 특성을 활용한 다양한 기기와 장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초음파 활용 초음파는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소리(20 Hz ~ 20,000 Hz)보다 훨씬 높은 고주파수의 음파를 말하며, 백만(1,000,000) Hz 수준까지 올라갑니다. 따라서 인간은 초음파를 들을 수 없지만, 박쥐나 나방, 돌고래와 같은 동물들은 초음파를 사용하여 먹이를 찾고 지형을 파악하며 의사소통을 하기도 합니다. 파장이 짧은 초음파는 직진성이 강하므로, 초음파 펄스를 발사하고 반사파를 측정하면 소리의 속도와 진동수(또는 파장)를 알고 있을 경우 주변 물체까지의 거리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료들을 모아 컴퓨터로 분석하면 물체의 영상도 분석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초음파 활용 장치는 자동차의 주차 보조 센서입니다. 초음파 센서(Ultrasonic Sensor)를 자동차 범퍼에 설치하여 주변에 초음파 펄스(Pulse)를 발사하고 되돌아오는 반사파를 감지함으로써, 5미터 이내의 큰 물체까지의 거리를 계산합니다. 그 결과, 기준 거리보다 가까워지면 경고와 알람을 띄워 운전자가 주의하도록 함으로써 접촉사고를 예방합니다. 또한 성능 대비 가격이 저렴하여 자동차 센서로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초음파 활용 장치 자동차 주차 보조 센서(좌) 의료용 초음파 영상 장치(우) 초음파 영상 장치는 비교적 넓은 영역에 걸쳐 인체 내부에 초음파를 발사하고, 장기 외벽에서 돌아오는 반사파를 통해 영상을 분석하는 장치입니다. 피폭의 위험성이 있는 엑스레이나 CT 촬영에 비해 인체에 해가 적어 의료용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복부와 목 부위, 특히 임산부의 태아 영상 분석에 사용됩니다. 물속에서는 음파가 더 멀리 도달하는 특성을 활용하여 초음파로 물속의 지형이나 물체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군사용으로는 적군의 잠수함을 탐지할 수 있고, 민간용으로는 어군을 ...

한석봉 어머니 일화, 유머 버전으로 재해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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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왔던 조선 최고 명필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 이야기는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이번 글에서는 '불을 끄고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을 쓰거라'의 일화로 유명한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에 대해 알아보고, 재미있게 바꿔본 유머 버전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 한석봉의 본명은 한호(한호)로, 1543년에 태어나 1605년에 사망한 조선 중기 문신이자 명필입니다. 석봉(석봉)은 그의 호인데, 우리에게는 한석봉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진사시에 합격한 후 가평군수 등의 관직을 얻었으며, 글씨를 잘 써서 나라의 여러 문서와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기 때문에 특히 선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당시 중국 관리나 문인들로부터도 극찬을 받았습니다. 석봉 한호는 어린 시절 집이 너무 가난하여 글을 쓸 종이를 살 돈이 없었기 때문에, 집 밖에서는 돌다리에 글씨를 쓰고 집 안에서는 질그릇이나 항아리 위에 글씨 연습을 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석봉 한호의 글은 짜임새가 뛰어나고 필력도 있어 당시 최고 명필로서 유명세를 떨쳤고, 이 때문에 국가 문서에 사용하는 특별한 서체가 생겨나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완성한 ‘석봉천자문(석봉천자문)’은 조선 천자문의 표준이 되어, 왕실과 사대부는 물론 전국의 모든 서당에서 사용하였습니다. 한석봉이 조선 최고의 명필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석봉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타고난 천재성과 성실한 노력 덕분에 이미 상당한 수준의 명필 경지에 올랐던 한석봉은 바로 자만에 빠졌고, 이를 지켜본 그의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야단치지 않고 슬기로운 방법으로 교육을 합니다. 한석봉과 어머니 호롱불을 끈 캄캄한 어둠 속에서 본인은 칼을 들어 떡을 썰고, 아들은 붓을 잡고 글씨를 쓰도록 한 후 불을 다시 켰습니다. 고르게 썰어진 어머니의 떡에 비해 삐뚤빼뚤 너무나 형편없는 아들의 글씨를 보며, 자만에 빠졌던 한석봉이 스스로 반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