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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의 3일 간절한 소원, 문화생활 소중함 깨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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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어릴 적 뇌척수막염을 심하게 앓아 시각과 청각을 영원히 잃어 장애인이 되었으나, 설리번 선생님과의 운명적 만남과 소통을 계기로 끊임없는 노력과 학습을 진행하였고, 그 결과 오히려 일반인보다 더 미국에서 유명한 작가이자 사회 복지 사업가로 성장했던 헬렌 켈러 여사를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세계 최초로 대학교육을 받은 시각·청각 장애인이라는 타이틀도 갖고 있습니다. 장애인들을 위한 교육과 사회복지시설의 개선을 위해 앞장섰고, 여성과 노동자 등 소외된 사람들의 인권을 위한 사회운동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중증 장애를 극복하고 위인에 대열에 합류한 이러한 그녀도 보고 싶고 듣고 싶어 하는 기본적인 오감에 대한 열망과 그에 대한 연민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헬렌 켈러 3일 동안 볼 수 있다면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이란 수필을 쓰면서 이러한 얘기를 하였습니다. 만일 내가 3일만 볼 수 있다면, 첫날에는 친절과 우정으로 저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준 사람들을 보고 싶습니다. 손으로 만져보는 것이 아니라, 그 친구들의 내면을 깊이 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을 모두 보고 싶습니다. 오후에는 숲속을 산책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몸과 마음을 담그고 싶습니다.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둘째 날에는 새벽에 일어나 밤이 낮으로 바뀌는 가슴 떨리는 기적을 보고 싶습니다. 저는 예술을 통해 사람들의 영혼을 탐험하고 싶습니다. 그날 저녁에는 영화나 연극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나의 촉각으로는 결코 알아차리지 못했던 그것들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난 후, 박물관에 가서 손끝으로만 보던 조각품들을 보면서 나의 과거와 현재를 보고 싶습니다. 셋째 날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고 가는 평범한 거리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도시 이곳저곳에서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바라보며 그들이 어떻게 일하고 사는지를 보고 싶습니다. 저녁에는 다시 한번 극장 홀에 가서,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희극이 함축하는...

미켈란젤로의 동기: 완벽을 향한 예술가의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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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탄생 1475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미켈란젤로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시골의 유모 집에서 자랐는데, 이때 유모의 남편 직업이 석수장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상당 부분을 조각용 끌과 망치를 갖고 놀며 보낸 미켈란젤로는 조각가로 성장하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예술가로 성장하고자 하는 미켈란젤로에 대한 집안의 반대가 매우 심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나 삼촌들로부터 혼나고 두들겨 맞았지만, 그의 예술가로서의 열정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미켈란젤로 큰 전환점은 예술을 사랑하는 메디치 가문의 수장 로렌초 데 메디치의 눈에 띄면서 예술가적 재능을 인정받게 되었고,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에도 매우 값비싼 대리석을 마음껏 조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는 조각가로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명 인사들과 학자들에게 철학과 문학을 배우는 기회까지 주어졌기에, 예술 활동에 필요한 학식과 소양도 깊이 쌓을 수 있었습니다. 주요 작품 20대 중반에 조각한 피에타(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2m의 조각상, 마리아의 아름다움과 예수의 죽음을 슬프고도 아름답게 표현)로 일약 스타가 되어, 르네상스 시대의 3대 예술가 거장이 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는 듯하였습니다. 피에타 마침내 구약 성서에서 돌팔매로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을 조각한 다비드 상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으며 거장의 대열에 오르게 됩니다. 다비드 이후에도 시스티나 소성당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등의 회화 작품과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등 다방면의 걸작 예술품들을 남겼습니다. 최후의 심판 (일부분) 미켈란젤로 동기 미켈란젤로는 외모를 꾸미는 데 관심이 전혀 없어서 외출 시에도 작업하던 상태 그대로 다닐 정도였습니다. 또한 성격도 까다롭고 직설적이며 거만하여, 마음에 들지 않으면 윗사람은 물론 교황에게조차 대들거나 친구들에게도 자주 독설을 내뱉어서 폭행을 당하고 왕따를 당하기도 한, 매우 독특하고 전형적인 천재 스타일이었...

맹사성 일화: 고개를 숙이면 부딪히는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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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에서는 우리에게 겸손함의 중요성을 알려주었던 맹사성의 일화와 그가 남긴 교훈을 알아보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히는 법이 없습니다 열아홉의 어린 나이에 장원 급제를 하여 스무 살에 경기도 파주 군수가 된 맹사성은 자부심을 넘어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맹사성은 한 무명 선사를 찾아가 거만하게 물었습니다. "스님이 생각하기에, 이 고을을 다스리는 사람으로서 내가 최고로 삼아야 할 좌우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오?" 그러자 무명 선사가 대답했습니다. "그건 어렵지 않지요.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많이 베푸시면 됩니다." "그런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치인데, 먼 길을 온 내게 해 줄 말이 고작 그것 뿐이오?" 맹사성은 또다시 거만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습니다. 그러자 무명 선사가 녹차나 한 잔 하고 가라며 한사코 그를 붙잡았습니다. 맹사성은 못 이기는 척 자리에 다시 앉게 되었습니다. 스님이 차를 찻잔에 따르기 시작한 후, 찻물이 넘치는데도 그의 찻잔에 자꾸만 차를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스님, 찻물이 넘쳐 방바닥으로 흘러 모두 적시고 있습니다." 맹사성이 당황하며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하지만 스님은 태연하게 계속 찻잔이 넘치도록 차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잔뜩 화가 나 있는 맹사성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면서,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모르십니까?" 스님의 이 한마디에 맹사성은 한 방을 맞은 듯하였고,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어지면서 민망함에 황급히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머리를 문에 세게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히는 법이 없습니다." 맹사성 맹사성은 조선 초의 황희 정승과 함께 세종 시기는 물론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재상이자 청백리의 ...

타이거 우즈 아버지 얼 우즈의 교육 철학, 자발성 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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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 우즈 골프 얘기를 하게 되면 그의 특이한 이름뿐만 아니라 경이적인 PGA 기록으로 인해 화제에서 빠뜨릴 수 없는 선수가 바로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오늘날의 타이거 우즈를 있게 한 또 다른 우즈, 타이거 우즈의 아버지인 2006년에 작고한 얼 우즈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얼 우즈의 생애 얼 우즈는 장래가 촉망되는 야구선수였지만 항상 인종차별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타 지역의 어웨이 경기 때에도 흑인 출입금지로 인해 다른 동료들과 같이 고급 호텔에서 식사하고 숙박하지 못하고 혼자 따로 생활해야 할 정도로 차별이 심한 시기여서, 결국 얼 우즈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ROTC를 거쳐 그린베레의 특수요원이 됩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얼 우즈는 베트콩과의 전투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월남군 장교와 절친이 되었는데, 타이거는 그의 별명이었습니다. 타이거 우즈와 얼 우즈 얼 우즈는 타이거를 골프 챔피언이 되게 하기보다는 골프와 인생 모두에서 승자가 되도록 가르치려고 노력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나 타이거에게 골프 자체를 강요하지 않았으며, 스스로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학습만이 의미가 있다고 믿고 또 그렇게 실행하였습니다. 또한 얼 우즈는 인종차별에 대한 고민이나 성장기 소년의 이성 관계 등 타이거의 어떤 이야기도 마치 친구처럼 귀 기울여 들어주었습니다. 흑인으로서 세계 최고가 되어 그 누구도 차별할 수 없도록 최정상의 골프 챔피언이 되는 공동의 목표를 수립하고, 끊임없이 제안하고 안내하였습니다. 얼 우즈가 남긴 교훈 얼 우즈는 생전에 이렇게 말하곤 하였습니다. "나는 타이거가 원하지 않는 것을 강요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스스로 필요성을 느끼고, 자발적으로 필요한 것을 하도록 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큰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방향성과 비전을 제시하는 것만이 제 역할입니다." 세계 최고의 아들을 만들지는 않더라도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한국의 아버지들이 한 번은 깊이 고민해 봐야 ...

도스토옙스키의 파란만장한 삶과 '죄와 벌' 핵심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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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에서는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삶과 그의 명작 죄와 벌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도스토옙스키 여름의 인상을 둘러싼 겨울의 수상,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 등 근대소설의 또 다른 방향성을 제시하여 높이 평가받는 도스토옙스키(1821년~1881년,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는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대문호입니다. 하지만 그 자신도 본인의 작품 속 주인공들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17세 때 페테르부르크의 육군 중앙 공병학교에 입학하여 서구문학을 접할 수 있었으며 졸업 후 공병단에 잠시 근무하였으나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퇴역하고 첫 작품인 '가난한 사람들'로 호평 속에 등단합니다. 이후 몇 작품을 더 썼으나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며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의 집단에 가입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849년 4월, 러시아 정교회와 정부를 비판한 개혁 사상가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총살형까지 선고되었는데 형 집행 바로 직전에 황제의 칙령으로 사형을 극적으로 면하고 징역형으로 감형되어 시베리아 교도소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도스토옙스키 어떻게 보면 한 편의 영화 같은 이러한 충격적인 경험과 정서적 자극들로부터 도스토옙스키는 이후의 많은 작품 활동에 큰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시베리아 교도소에서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독은 성서를 집중적으로 읽으면서 신과 인간에 대한 명상과 사색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조금씩 병들어 가는 19세기의 러시아의 모순과 그 속에서 고뇌하고 굴욕을 당하는 인간상들을 그려낸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모습을 작품에 투영하기도 하였는데, 실제로 도박의 늪에 깊이 빠져서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니는 방랑생활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도박에 대한 경험은 작품 '도박자'의 소재로도 활용되었고, 이 때문에 아내 안나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안나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의 안정을 찾은 도스토옙스키는 1881년 폐기종으로 사망하...

차이콥스키, 사후에 빛났던 천재의 비극과 성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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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는 세계적인 러시아 작곡가로, 특히 발레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은 발레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너무도 잘 아는 그의 3대 발레 작품입니다. 차이콥스키의 음악 인생 러시아 감성으로 러시아 음악을 전 세계에 알린 그도 처음에는 평범한 공무원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하여 4세 때부터 피아노를 쳤고, 음악가가 되고자 하는 의지와 소질도 있었지만 공무원이 되길 원하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법률을 공부한 뒤 공무원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술가의 열정을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었습니다. 20대 초반에 뒤늦게 음악 공부를 시작하여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까지 되었으나, 결혼 실패로 감수성이 예민했던 그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고 음악원도 그만두었습니다. 차이콥스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의 열렬한 팬이었던 폰 메크 부인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아 유럽의 여러 나라와 미국을 여행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기존 서유럽 음악의 형식이면서도 러시아 감성이 담긴 음악과 발레곡을 창작하고, 지휘와 연주를 병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과 같은 명성과 인기를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그의 대표 발레곡 중 하나인 《백조의 호수》가 첫 공연에서 관객의 외면을 받았고, 다른 발레곡들도 그의 뛰어난 음악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스토리와 안무의 부조화 때문에 인기를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차이콥스키가 세상을 떠난 뒤 다른 예술가들에 의해 발레의 스토리와 무용이 보강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호평받는 작품이 된 것입니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 그가 제시한 러시아 음악은 처음에는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예외 없이 널리 사랑을 받는 명곡들이 되었습니다. 영감을 얻는 방법 천재의 위대성은 사후에 재평가되고 재확인되는 것이 안타깝지만, 시대를 앞서가는 예술가들의 업보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 그의 음악적 성과가 타고난 재능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어 소...

충신 최영, 왜 고려 멸망에 기여했나? 역사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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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빛낸 위인 중에 한 사람으로서 최영 장군은 중고등학교 시절, 고려시대의 충신 중에 충신으로 배웠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라는 다소 냉철한 시각으로 보면 무조건적인 단순 충성심으로 고려가 멸망하게 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던 장군으로도 해석하기도 합니다. 고려 말의 문제점 고려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명장이자 충신인 최영 장군은 일평생 오직 고려만을 생각했고 사리사욕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 시대를 살아간 백성들이나 지금의 우리나라 국민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갑작스러운 공민왕 암살 후, 고려 기득권 세력 이익집단의 우두머리였던 이인임이 권력 실세로 나서면서 발생합니다. 이인임이 공민왕의 친명 정책을 버리고 친원 정책을 택하자 강력하게 반대하는 정몽주, 정도전 등 신진 성리학자들을 모두 유배를 보내고 국문을 하였는데 그 선봉에 섰던 사람이 바로 최영 장군이었습니다. 최영 장군 최영 장군은 이인임의 정책을 찬성했던 것도 아니었고 심성이나 인격을 존경했던 것도 아니며 심지어 무진정변을 제압할 당시 이인임을 살려주는 이해하기 힘든 행태를 보여줍니다. 물론 최영 장군도 친명보다는 친원 정책을 찬성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 이유만으로 이인임의 하수인 역할을 한 것을 전부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역사학자들은 대항마가 없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공민왕 암살 후 권력 공백기에 나타난 이인임을 대신할 마땅한 사람이나 세력이 없으니, 고려만을 생각한 최영 장군은 싫어도 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려왕조를 개혁하고 발전시킬 신진 성리학자들을 모두 탄압하여 귀향 보내고 어린 우왕을 허수아비로 내세운 이인임은 탐욕스러운 권신들과 함께 정권 말기 온갖 부패의 온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군사력을 보유한 최영 장군이 있는 한 아무도 이들을 건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최영 장군의 실수 최영 장군은 이러한 이인임을 비난하고 질책하고 망해가는 고려를 크게 걱정하면서도, 그 이외의 어떠한 새로운 생각이나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